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탕산 사건 (문단 편집) === 장호합작의 분열 === 하지만 과거부터 당권파에 몸담으며 당권지상주의를 외쳤던 후한민은 [[황포군관학교]] 교장으로 세력을 키우기 시작해 군권을 중시하는 장제스와 사상 문제로 충돌하기 시작했다. 장제스가 과거 우한 정부와 틀어졌던 이유 중 하나가 왕징웨이와 보로딘이 장제스의 군권을 제약하려 했기 때문인데 장제스는 이를 자신을 파멸시키려는 음모로 받아들여서 매우 발악적으로 저항하였다. 1927년 4월 난징 정부가 수립되자 장제스는 자신의 군권을 제약하려는 기구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으려 했으나 당권파인 후한민은 이에 반대했다. 같은 해 장제스는 우한 측에서 [[영한합작]]의 조건으로 장제스의 하야를 요구하자 잠시 하야했었는데 다시 국민당의 지도자로 복귀하려는 계획에서 장제스는 얼마 전까지 정적이었던 왕징웨이와 손을 잡는 것도 조금도 꺼리지 않았다. 장제스가 왕징웨이와 야합하는 것을 본 후한민은 분노하여 유럽으로 떠나기도 했다. 1928년 후한민은 훈정대강을 제출하며 이제 북벌도 끝났으니 쑨원의 유지대로 5권 분립의 헌정 체제를 수립할 것을 주장했는데 장제스도 이에 찬성하면서 국민당 2기 5중 회의는 이를 수락, 약법을 제정하기로 하였다. 후한민이 프랑스를 떠나 홍콩에 도착하자 광저우의 군벌 천지탕 등은 후한민에게 난징에 가지 말고 광저우에 머물 것을 요청했는데 이는 광저우 파벌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통일된 중국을 원했던 후한민은 자신의 기반인 광저우를 떠나 난징으로 행했다. 한편 장제스가 후한민의 의견에 찬성했던 이유는 각지에서 중앙의 통치를 거부하고 왕처럼 행세하는 군벌들의 세력을 훈정을 통해 억제하고 장기적으로 군정을 종식하고 지방의 군사적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서였다. 1928년 10월 3일 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는 훈정이 시작되었음을 선포하고 훈정강령과 국민정부조직법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저마다 사병을 거느리고 떵떵거리는 군벌들을 실질적으로 약화시킬 수 있는 대응책이 나오지 않는다면 훈정은 말로 끝날 뿐이었다. 이 때문에 훈정 시작 이전인 1928년부터 국민당은 225만에 달하던 국민당군을 대대적으로 감축하기로 결정, 7월 11일에서 12일에 걸쳐 펑위샹, 옌시산, 리쭝런, 장제스 4인이 베이핑에서 회담을 가지고 국민혁명군을 60개 사단으로 감축하기로 합의했다. 이를 [[편견회의]]라 한다. 하지만 1929년 구체적인 병력 감축안이 나오자 군벌들은 자신의 세력을 약화시킨단 조치에 크게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이러한 군벌들의 불만은 정치분회 폐지 안건을 두고 폭발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